열국지 009.
[列國誌]
■ 1부 황하의 영웅 (9)
제 1권 난세의 강
제2장 요녀(妖女) 등장 (2)
사람들은 흔히 세월을 흐르는 물에 비유한다.
또 쏜 화살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만큼 빠르고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이리라.
그랬다. 세월은 물처럼 흘렀다.
죽음 직전에서 겨우 살아난 포사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열다섯 살의 나이가 되었다.
시집가도 될 만큼 성숙했다.
포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눈은 이른 아침의 샘물처럼 맑았고, 눈썹은 가을밤의 달빛처럼 고왔으며,
입술은 잘 익은 앵두 같았고, 이는 보석처럼 희었다.
엉덩이까지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에선 기름이 흘렀으며, 손톱은 옥을 박은 듯 윤이 났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정신이 몽롱해지지 않으면 사내가 아닐 만큼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녀가 사는 마을은 포성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촌락이었다.
그 마을의 농지는 거의 포향(褒珦)의 소유였다.
포향이 누구인가.
조숙대의 망명 직후 주유왕에게 충언을 올렸다가 감옥에 갇힌 포성의 영주가 아니던가.
벌써 3년째 풀려나지 못하고 죄수 생활을 하고 있다.
그 포향(褒珦)에게 아들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홍덕(洪德)이라고 했다.
포성 일대의 농지는 홍덕(洪德)이 맡아 관리했다.
그는 매년 가을이 되면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소작민들로 부터 곡식을 거두어들였다.
그 해도 마찬가지였다.
홍덕(洪德)은 추수한 곡식들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포사가 살고 있는 마을로 들어섰다.
때마침 포사는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비록 입은 옷은 허름하고 낡았지만 하늘에서 타고난 아름다운 자태는 가릴 수가 없었다.
우연히 우물가를 지나던 홍덕(洪德)은 포사의 자태에 눈이 부셨다.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런 시골에 저런 절세미인이 있다니!'
그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미인을 집으로 데려다가...'
홍덕(洪德)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는 효자였다.
아버지 포향(褒珦)을 구해낼 방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홍덕(洪德)은 포사의 집과 이름을 알아낸 후 포성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아버님께서 어질지 못한 왕에게 바른말을 고하시다가 옥에 갇힌지 어느덧 3년이 지났습니다.
듣자하니 왕은여색을 좋아하여 사방에서 미인을 구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어제 보니 사대의 딸이 이만저만한 절세미인이 아닙니다.
황금과 비단으로 그 미인을 사서 왕에게 바치면 아버님을 옥에서 빼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옛날 산의생(散宜生)이 주문왕을 옥에서 구해낸 계책이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은나라 주왕은 한때 서백(西伯)인 주문왕의 세력을 경계하느라 그를 궁성 감옥에다 가두어둔 적이 있었다.
신하들이 백방으로 주문왕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심복 부하 산의생(散宜生)이 미인 열 명을 주왕에게 바쳤다.
이에 주왕은 주문왕을 감옥에서 풀어주었다가, 얼마 후 주문왕과 그 아들 주무왕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홍덕(洪德)은 바로 이 고사를 떠올리고 아버지 포향(褒珦)을 구출해내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홍덕의 어머니 역시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찌 황금과 비단쯤 아까울 것이 있겠느냐.
어서 포사라는 아이를 데려오너라."
홍덕(洪德)은 다시 길을 떠나 사대의 집으로 갔다.
사대는 욕심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홍덕이 제시한 액수는 사대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황금 1백 일(鎰)과 비단 3백 필이라구요?"
"부족하다면 더 드리겠소이다. 시집보내는 셈치고....."
홍덕은 말을 나눈 끝에 황금 2백 일(鎰)과 비단 3백 필에 포사를 사기로 사대와 합의했다.
그 날로 홍덕(洪德)은 포사를 데리고 포성 집으로 돌아왔다.
우선 목욕을 시킨 후 날마다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먹이고, 수놓은 비단옷을 입히고 궁중의 예의범절을 가르쳤다.
포사는 영리했다.
자신의 앞날에 커다란 변화가 도래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홍덕(洪德)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랐다.
웃음과 친절보다는 차갑고 거만한 태도가 남자들의 관심을 더 끈다는 사실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포사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어느덧 그녀의 말과 행동에서는 촌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도회지 여인들보다 더 세련된 기품과 몸 매무새를 자아냈다.
'이제 되었다.'
마음 속으로 크게 기뻐한 홍덕(洪德)은 포사를 데리고 호경으로 올라갔다.
그는 먼저 주유왕의 심복이자 삼공(三公)중의 한 사람인 괵공 석보를 찾아갔다.
"무슨 일로 왔는가?"
"제 친척 중에 포사라는 절세미인이 있는데, 천자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요즘 왕께서는 무척 분주하신데, 쉽게 알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고개를 돌리는 괵석보 앞에 홍덕(洪德)은 미리 준비해간 보화를 내놓았다.
괵석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제 아비만 옥에서 풀려나게 해주십시오."
"자네가 말한 미인이 왕의 눈에 들기만 한다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괵공 어르신만 믿겠습니다."
다음날 괵석보는 궁으로 들어가 주유왕에게 아뢰었다.
"지금 포향의 아들 홍덕(洪德)이 아비를 살리기 위해 특별히 포사라는 절세미인을 구해왔습니다.
홍덕의 효성을 보아서라도 포향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절세미인이라는 말에 주유왕은 귀가 번쩍 뜨였다.
"포향의 아들이 바쳤다는 그 계집을 데려와 보아라."
잠시 후, 한 여인이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포사였다.
그녀는 그 동안 훈련받은 대로 궁중예법에 맞춰 주유왕에게 사뿐히 절을 올렸다.
그 자태가 흡사 꽃잎 위로 내려앉는 한 마리 우아한 나비 같았다.
삽시간에 전각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포사의 얼굴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그만큼 포사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주유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포사의 용모와 행동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의 눈에는 벌써부터 기쁨의 빛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제껏 이보다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있던가.
지금 궁 안에 있는 여인들도 미인이라 하여 데려왔는데,
포사에 비하면 미인이라는 말이 가당치도 않았다.
보름달과 반딧불만큼의 차이였다.
"포향(褒珦)을 풀어주고 지난날의 벼슬을 돌려주어라."
주유왕은 명을 내리고는 포사를 데리고 별궁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주유왕은 포사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
포사는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잠자리 기술을 타고난 모양이다.
주유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맛보았다.
다음날에는 아예 별궁 후원에 경대(瓊臺)를 짓고 포사를 그 곳에 들여 앉혔다.
은나라 주왕이 녹대(鹿臺)를 지어 달기를 총애한 것을 흉내 낸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주유왕은 앉으면 포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서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실 때면 잔을 하나로 하고, 밥을 먹을 땐 같은 그릇으로 먹었다.
조회는 한 달에 한 번 하면 많이 하였고, 백관들은 왕을 보러 갔다가 그냥 돌아가기가 일쑤였다.
주유왕 3년 때의 일이었다.
11편에 계속........
유머 글쓰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