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글쓰기 평설 열국지 031
[列國誌]
■ 1부 황하의 영웅 (31)
제 1권 난세의 강
제5장 이상한 인질 교환 (1)
반란을 일으킨 태숙 단(段)이 자결하고 정장공(鄭莊公)과 무강이 극적인 화해를 함으로써 정나라 내분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 패업(覇業)을 이루리라!
정장공(鄭莊公)은 아버지 정무공의 기질을 이어받았다.
패기와 야심에 찬 인물이었다.
패업은 천하통일과는 다르다.
백(伯)이라는 말이 있다.
왕실의 천자가 내리는 작위중의 하나인 백작을 의미하기도 하나, 제후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방백(方伯), 또는 패공(覇公)이라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
위로는 천자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아래로는 뭇 제후와 백성들의 추앙을 받아야 하는 것이 방백이다.
간웅(姦雄)의 기질이 농후한 정장공(鄭莊公)이고 보면 이러한 야망을 품는 것도 결코 이상하지는 않다.
- 이제 그 첫발을 내디딜 때다.
동생 단(段)과의 골 깊은 싸움에서의 승리는 정장공(鄭莊公)을 오히려 단련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겪었던 내홍(內訌)의 후유증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태숙 단(段)이 반역의 군사를 일으키기 전 그 아들 공손활(公孫滑)을 위나라로 보내 원군을 요청했던 사실을 정장공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공손활(公孫滑)은 정장공과 숙질간이다.
동시에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다.
이 공손활의 원한이 후일 정장공(鄭莊公)의 야망을 방해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할 줄 누가 알았으랴.
위(衛)나라는 주무왕의 동생인 강숙의 봉국으로 주왕실의 인척 제후국이다.
영지는 지금의 하북성 일대이며, 옛 은나라가 다스리던 땅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정장공의 아버지 정무공과 함께 주왕실의 어지러움을 종식시키고 주평왕을 왕위에 올린 주역 중의 한 사람인
위무공(衛武公)은 주평왕 13년에 90여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군위에 오른 사람이 위장공(衛莊公)이다.
위장공(衛莊公)은 처음 제(齊)나라 공실의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름을 장강(莊姜)이라 했다.
장강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위장공은 두 번째 부인을 맞아들였다.
진(陳)나라 공실의 딸로 이름을 여규라 했다.
여규는 시집올 때 대규라는 나이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왔다.
함께 시집온 것이다. 이런 일이 당시에는 비일비재했다.
이것을 잉, 또는 잉첩이라고 한다.
몸종이라는 뜻으로 주요 임무는 모시고 온 주인 (여기서는 언니인 여규)의 시중을 드는 일이다.
그런데 두 번째 부인 여규도 애를 낳지 못했다.
처음 아들을 한 번 낳았지만 일찍 죽고, 그 뒤로는 아예 임신을 하지 못했다.
위장공(衛莊公)의 고민은 컸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내궁에 앉아 울적한 마음을 달래며 술을 마시던 중 시중을 들던 대규를 보았다.
새삼스레 여인으로 보였다.
위장공(衛莊公)은 대규에게 손을 뻗었다.
대규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 대규에게 태기가 보였다.
열 달 후 아들이 태어났다.
위장공(衛莊公)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컸다.
이름을 완(完)이라고 짓고, 그를 세자로 삼았다.
다음 다음해에도 또 대규에게서 아들을 보았다.
이번에는 진(晉)이라고 지었다.
위장공(衛莊公)의 첫번째 부인 장강은 대규가 낳은 두 아들을 자기 소생처럼 정성껏 길렀다.
당시 제후 부인의 주역할은 공실 번창이다.
공실 번창은 많은 아들을 생산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다다익선(多多益善) -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장강은 또 다른 궁녀를 위장공에게 천거했다.
그 궁녀의 몸에서 또 아들이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주우.
몇 년 사이 세 아들을 두게 된 위장공(衛莊公)은 매우 흡족했다.
그 중에서 특히 막내아들인 주우를 사랑했다.
주우는 성장하면서 유별나게 무예를 좋아하고 병법 등 군사에 관해 많은 관심을 쏟았다.
성격이 거칠고 독선적인 것이 흠이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에는 그것마저 예쁘게 보였다.
"장부가 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덧 위장공(衛莊公)은 주우가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좋다며 방임했다.
뿐만 아니라 주우의 병법이 예사롭지 않음을 높이 평가하여 군사 지휘권을 그에게 맡겼다.
위장공(衛莊公)에게는 석작이라고 하는 슬기로운 신하가 있었다.
벼슬이 상경(上卿)이니 위나라 재상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석작은 어질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성격이 곧고 강직했다.
특히 선악의 구별을 유난히 강조하는 정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석작의 눈에 위장공(衛莊公)의 주우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은 극히 위태롭게 비쳤다.
한 번은 조용히 위장공(衛莊公)에게 간했다.
"모름지기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옳고 바른 것으로써만 가르쳐야 합니다.
그릇되고 악한 것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총애함이 지나치면 총애 받는 자는 교만해지며, 교만이 지나치면 난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만일 주공께서 주우를 진정으로 사랑하시어 군위를 전할 마음이 계시다면 아예 주우를 세자로 정하시어 기본을 세우시고,
그럴 생각이 아니시라면 주우의 방자함을 억압하시어 훗날의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십시오.
더욱이 주공께서는 주우에게 군대를 맡기셨습니다.
주우가 비록 군사 방면에 조예가 있긴 하지만, 그는 첩의 소생입니다.
장차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위장공(衛莊公)은 상경 석작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오히려 석작을 비웃었다.
'자기 자식이나 잘 가르치지.'
위장공(衛莊公)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석작에게는 석후(石厚)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석후가 한마디로 개망나니였던 것이다.
더욱이 석후는 주우와 가깝게 어울려 다니며 온갖 불미스런 짓을 저지르곤 했다.
주우가 병권을 갖게 되면서 두 사람은 더욱 안하무인이 되었다.
한 번은 자기 소속 병사들을 이끌고 교외로 사냥을 나갔다.
훈련이 목적이었으나, 그들이 사냥터에서 한 일이라곤 마을 하나를 완전히 도륙내어버린 일이었다.
마을은 불타 폐허가 되었고, 죽은 백성만도 수십 명이 넘었다.
-주우도 나쁘지만 그에 빌붙어 꼬드기는 석후(石厚)가 더 나쁜 놈이다.
이런 소문을 듣자 석작은 더 이상 석후의 행동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아들 석후(石厚)를 붙잡아 50대나 매질을 하여 빈 방에다 가두어버렸다.
그러나 석후는 못 말리는 자였다.
어느 날, 방의 벽을 뚫고 담을 넘어 주우의 부중(府中)으로 달아났다.
그 날부터 아예 주우와 침식을 같이 하였다.
일이 이쯤 되자 석작도 아들 석후(石厚)를 더 이상 어쩌지 못하였다.
이러한 중에 위장공(衛莊公)이 세상을 떠나고 공자 완(完)이 군위에 올랐다.
그가 위환공(衛桓公)이다.
위환공은 온후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성품이 주우와 석후의 눈에는 나약하고 결단력이 모자라는 것으로 비쳤다.
그들은 위환공을 얕잡아보았다.
- 능히 해치울 수 있다.
- 때를 기다립시다.
이런 의논이 두 사람 사이에 비밀리에 오갔다.
위나라 사정이 이러할 때 정나라 경성에서 공손활(公孫滑)이 달려와 태숙 단(段)의 전갈을 전한 것이었다.
"백부가 제 아버지를 미워하여 경성을 치려고 합니다.
바라건대 군후께서는 불쌍한 제 아버지를 위해 군사를 빌려 주십시오."
위나라와 정나라는 친밀하지도 않았지만 나쁜 관계도 아니었다.
군사를 동원하여 태숙 단(段)을 돕는다는 것은 곧 정나라 군주인 정장공과 원수가 됨을 의미한다.
위환공(衛桓公)은 그렇게 하면서까지 태숙 단(段)을 돕고 싶지는 않았다.
"형이 동생을 죽일 리가 있겠는가? 좀더 사태를 두고 보자."
이렇게 대답하고 차일피일 군사 내주는 것을 미루는 사이.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태숙 단(段)이 정장공의 공격을 받아 공성에서 죽고, 어머니 무강마저 영(潁) 땅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었다.
공손활(公孫滑)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였다.
"아아, 기어코 백부가 내 아버지를 죽였구나."
위환공(衛桓公)은 심지가 굳센 사람이 아니었다.
32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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