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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글쓰기 평설 열국지 023

by 다빈1966 2021. 9. 10.

[列國誌]

■ 1부 황하의 영웅 (23)

제 1권 난세의 강

제3장 제후시대가 열리다(8)



마침내 태자 의구(宜臼)는 주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주평왕(周平王)이 되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이번 난리를 신속하게 처리한 여러 제후들에 대해 논공행상 실시했다.


가장 먼저 견융(犬戎)을 왕성에서 몰아내는 데 큰 공 세운 위나라 제후에게 삼공(三公) 중 하나인 사도의 직책 내렸다.

이때부터 위(衛)나라 군후 죽은 후 붙이는 시호에 공(公)자 넣기 시작했다.

따라서 위무후 실제로 위무공(衛武公)이다.

이제부터 위무공으로 부르겠다.


진문후에게 하내(河內)땅을 부용(附庸, 속국)으로 내려주었다.

영토 넓혀줌으로써 보답한 것이다.

주유왕 위해 전사한 정백 우에게 환공(桓公) 시호 내리니,

그가 곧 정나라 시조 정환공(鄭桓公)이다.


아울러 세자 굴돌에게 경사(卿士)벼슬 내리고, 주왕실 위해 제사 지낼 수 있는 특전 내리었다.

제후국 아님에도 군사 이끌고 달려온 진군(秦君) 영개에게 백작 봉하여 제후 반열 서게 했다.

공식 제후국으로 인정한 것이다.


진군 영개는 죽어서 양공(襄公)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는데, 이 진양공(秦襄公)이 바로 진나라 초대 군주이다.

이 밖에 주공 훤에게는 태재(太宰)의 관직을 내려 조정을 다스리게하고,

괵석보와 윤구 등은 주유왕을 위해 죽은 것을 참작하여 생전의 벼슬을 그대로 두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단 하나

- 신후(申侯)였다.


그는 이번 난리 일으킨 주모자이기도 했으나, 또한 난리 수습자이기도 했다.

주평왕(周平王)은 이런 신후에게 아무런 벌도, 상도 내리지 않았다.

그냥 후작으로 머물게 했다. 따로 조정 벼슬도 내리지 않았다.

신후(申侯) 모든 것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왕실에 남긴 상처 매우 컸다.


무엇보다도 왕실 권위 떨어뜨렸다.

천자란 천명 받들어 시행하는 사람 뜻이다.

이제껏 그렇게 인식하고 존경해 왔으며, 그 권위와 존엄성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승복했다.

그런데 그것이 여지없이 깨어졌다.


- 천자가 별것이냐.

이런 사상이 각 제후들의 머릿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이 사상과 연관되는 또 하나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는 무력(武力)제일주의의 태동이었다.

지금까지는 주 왕실에 대해 감히 창칼을 겨눌 수가 없었다.

- 주왕실은 세다.

이런 인식이 잠재해 있었다.

그런데 신후(申侯)의 왕성 공격에 의해 주왕실의 무능한 군사력이 여지없이 들통났다.

이제 각 봉국의 제후들 머릿속에는,

- 주 왕실은 약하다.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별볼일 없다는 깔봄이 은밀히 싹트기 시작했다.

'힘만 있으면 된다'라는 생각이 각 제후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는 견융(犬戎)의 주왕실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비록 다른 제후들에 의해 본국으로 도주하긴 했지만 견융은 노골적으로 주나라를 얕보았다.

-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나라쯤으로 인식했다.



이런 주변국과 제후들의 사상 변화는 알게 모르게 새로 왕위에 오른 주평왕(周平王) 압박했을 것이다.

속된 표현으로 왕 노릇할 재미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상은 현실로 드러났다.

주왕실로부터 공식적으로 제후 관직 받은 나라 170여 개국.

그런데 주평왕(周平王)에게 등극 축하 사절단 파견한 제후국 불과 9개국뿐이었다.

진(晉), 우(虞), 동괵, 위(衛), 정(鄭), 채(蔡), 진(陳), 신(申), 진(秦)

- 모두 주왕실과 인접한 나라들이었다.

동쪽 멀리 떨어진 제(齊)나라, 노(魯)나라 등 대제후국이라 일컬어지는 나라들은

아무도 주평왕 등극에 대해 관심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주평왕(周平王)에게 이만저만한 치욕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달리 통제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것을….



이러한 정신적 갈등 속에 주평왕(周平王)을 더욱 압박해 들어온 것은 견융의 영토 침공이었다.

견융주는 호경까지 공격해오지 않았으나 국경 지대 수시로 넘나들며 기(岐)땅과 풍(豊)땅을 점령했다.

기, 풍은 모두 주왕조의 옛 터전으로 신성시하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오랑캐인 견융의 영토로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상당한 정신적 갈등에 시달렸을 것 틀림없다.


또 하나의 고충이 있다.

왕성에 재물 하나도 남아 있질 않았다.

궁성은 불타 폐허로 변했다.

재건 해야 하는데, 궁성 보수할 경비 하나 없었다.

그렇다고 제후들에게 손 벌릴 수 없는 일이었다.

벌린다 해도 축하 사절단 하나 보내지 않는 제후들이 원조를 해줄 리 없다.


'아 ----!'
정말 왕 노릇 하기 싫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왕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주평왕(周平王)은 고민 끝에 한가지 해결책 떠올렸다.

여러 제후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비쳤다.

"옛 왕께서 낙읍(洛邑)에 부도(副都)를 세우신 까닭은 무엇이오?"

낙읍은 지금의 낙양(洛陽)이요, 부도란 부수도 말한다.

주무왕의 뒤 이어 왕에 오른 주성왕(周成王) 도읍 호경에 두는 한편

낙읍에 부도 건설하고 자주 그곳에서 제후들 인견하였다.

부수도인만큼 화려하고 번잡했다.


주평왕(周平王)의 이 물음의 뜻을 제후들이 어찌 모르겠는가?

주공 겸 태재인 훤이 조용히 대답한다.

"낙읍은 천하의 중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곳을 주 도읍지로 삼아도 무방하겠구려."


"그러합니다. 더욱이 호경의 궁성 불타고 부서졌습니다.

새로 세우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만일 다시 세운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노역과 비용이 많이 들 것이므로 천하의 원망 높아질 것입니다.

또한 견융의 기세가 날로 거세져 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묘책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나의 뜻과 꼭 같소."


마침내 주평왕이 생각해 낸 천도(遷都)는 정책으로 결정되었다.

그때부터 천도 준비가 시작되고 그 이듬해에 이르러서는

종묘사직은 물론 성안의 모든 백성들까지 주평왕(周平王)을 따라 낙양으로 이동해갔다.


길고도 긴 행렬이 황하 강변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이를 장관이라고 해야 할까, 처연함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천도로 인해 중국이라 불리는 한 마리 거대한 용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암시를 <사기>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주평왕, 견융을 피해 낙읍으로 동천(東遷)하다.

이때 왕실은 쇠약해졌고 제후들은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 병탄하였다.

간략함 중에도 한 왕조의 몰락에 대한 처연함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혼돈의 시대를 예감케 하는 강렬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주평왕 원년, 서력으로는 BC 770년의 일이었다.

사가들은 이 해를 기준으로 주무왕부터 주유왕까지를 '서주(西周)'라고 하며,

동쪽 낙읍으로 이주한 주평왕 시대부터 BC 256년 진(秦)에게 완전히 멸망당할 때까지를 '동주(東周)'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주왕조의 실제 통치력은 서주의 주유왕을 끝으로 막을 내렸고,

동주라 부르는 시대는 영향력을 상실한 채 단순히 상징적인 천자국으로 존재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많은 역사학자들은 '동주시대'라는 말 대신 '춘추전국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춘추(春秋)'라는 말은 공자(孔子)의 저서 <춘추>라는 연대기에서 비롯되었고,

'전국(戰國)'이라는 말은 제후시대 후반기의 외교가들의 활동을 담은 <전국책>이라는 서적에서 따왔다.

24회계속...

유머 글쓰기 작가.